액자 속 초상화가 유혹한다. 거리의 화가가 그린 연필 초상화를 볼 때마다 나는 액자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정말 잘 그리는 것일까? 낯선 사람 앞에 앉아 나를 들이밀고 앞면을 그리게 하는 것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 망설이다가 막상 용기를 내려고 하니 그는 어떻게 내 마음을 읽었는지 십 분이면 된다고 의자에 앉으라고 권한다.

머뭇거리다 의자에 앉는다. 화가는 편하게 마음을 갖고 약간의 미소를 지어보라고 주문을 한다. 열어젖힌 부스 사이 화가의 등 뒤로 바닷물이 넘실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마음 한구석 현기증이 난다. 괜히 그린다고 했나? 지금이라도 일어설까? 용기를 내고 그를 훔쳐본다. 그는 한마디로 낡았다. 머릿속에 그렸던 멋진 화가는 아니다.

수세미처럼 엉킨 머리카락, 낡고 때로 찌든 외투, 갑자기 숨이 막힐 것 같다. 신뢰가 가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나를 이모님이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몇 가지 표정을 주문한다. 이럴 수가, 내가 보기엔 그가 더 늙어 보이는데 이모님이라니, 속상해진 마음 자락을 감추고 나는 그에게 프로필 사진으로 쓸려고 하니 잘 그려달라고 주문을 한다.

그는 최대한 청순한 이미지를 살려 그리겠다고 하더니 갑자기 외투를 벗고 연필을 잡는다. 그런데 외투 속의 옷도 낡을 대로 낡았다. 자줏빛의 긴 소매 위에 잿빛의 헐렁한 반소매 티를 입었는데 긴 소매 여기저기에 구멍이 뻥뻥 뚫려 있다.

이 사람의 컨셉인가? 하지만 연필을 잡은 그의 눈이 낡은 꿈을 꾸는지 빛이 난다. 그도 거리의 화가가 아니라 이름만 검색하면 모두가 아는 멋진 화가를 한때는 꿈꾸었으리라. 나는 최대한 잘 그려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표정에 신경을 쓰면서 그를 관찰한다.

여학교시절 미술 시간이 참 싫었었다. 미술 시간에는 스케치를 하는 일도 수채화를 그리는 일도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마음만은 앞서갔었다. 마음속으로는 어떻게 그려도 잘 그릴 것만 같은데 도화지 위에선 붓을 움직이는 것이 마음 먹은 대로 쉽게 되지 않았었다.

언젠가는 미술 선생님이 원하는 그림을 제대로 그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반 친구들 앞에서 무참할 만큼 혼이 난 적도 있었다. 그 뒤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대단해 보이고, 한편으로는 부러웠었다. 그러나 미술 선생님에 대한 원망은 마음 한편에 쇠꼬챙이처럼 남아있었다.

꿈을 꾸었다.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가는 나비를 그리고 싶었다. 화선지 위에 나비가 날개를 팔랑거리면서 꽃잎 위를 날고 있었다. 완벽하게 살아 움직이는 나비는 향기를 가득 품고 고운 날개를 흔들고 있었다. 향기에 취해 나도 나비가 되어 마음껏 꽃밭을 날아다녔다. 혼자서 황홀해지는 시간을 만끽하다 순간 깨어나면 그건 꿈이었다. 스케치하는 일도, 수채화를 그리는 일도 의미를 잃어가고 미술 시간은 그렇게 또 나에게서 멀어져갔었다.

시간이 흐르고, 오랫동안 비둘기 발만 그리는 연습을 했다는 피카소를 알게 되면서 그의 매력적인 그림 앞에 오래 머물게 되었고, 샤갈의 그림 앞에서는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 수가 있었다. 때로는 액자 속에 스며들어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한편의 멋진 작품을 막 완성한 화가라도 된 듯한 기분을 만끽하기도 했었다. 나는 정작 그림에 대해 문외한이면서도 화가들의 그림을 하나둘 엿보는 나만의 재미를 터득하게 되었다. 순간의 빛을 화선지에 담을 수 있는 화가의 손끝은 이제 내겐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십 분이면 그림을 완성할 수 있다는 거리의 화가, 잃어버린 꿈을 찾아 어디로 날아가는지 눈빛이 먹잇감을 찾는 맹수처럼 살아서 움직인다.?신뢰가 가지 않는 낡은 겉모습을 의심하는 사이 그는 혼신의 힘을 쏟아 나를 그리고 있다.?화선지 위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손끝 사이로 그는 잃어버린 꿈을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눈웃음을 쳐보라고 하길래 눈웃음을 쳐주었더니 한쪽 눈을 윙크하는 것처럼 찡긋거린다. 얼굴의 주름살 하나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쳐다보고 또 쳐다보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십 분 동안 천 번쯤 나를 쳐다본 빛바램 꿈이 마지막 눈빛을 거두어간다.

거리의 화가 손끝에서 새롭게 태어난 나는 근심 없는 소녀처럼 환하게 웃고 있다. 시간을 돌려 지난 시절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이제는 싫다. 적당히 주름진 얼굴, 이모라고 불리는 나이, 편해 보이는 내 모습이 좋다. 십 분 동안, 짧은 시간이지만?대상을 천 번쯤 관찰하는 힘을 거리의 화가한테 배운다. 그 힘이라면 나도 무엇인가를 해볼 수 있는 아직은 좋은 나이라고 위로해본다.

멀리 바다가 출렁인다. 물속의 깊이는 알 수 없지만, 화가의 손끝을 엿보는 일은 마냥 즐겁다. 오늘, 겉모습은 초라해 보이지만 최선을 다해 초상화를 그리는 거리의 화가를 엿보고, 내일은 모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그리는 손’을 엿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칠 것이다. 순간의 빛을 영원에 담는 클로드 모네처럼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기면서 살아가리라.

- 隨筆약력 -
․ 화순초등학교 60회
․ 2008년「현대수필」 등단
․ 2008년「열린시학」 등단
․ 저서 시집『물고기자리』,『엄마의 재봉틀』
․ 광주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과정 수료
․ 현 전남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전담강사
․ 현대수필문인회원
․ 한국작가회원
․ 동천문학상, 열린시학상 수상


화순일보 mire537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