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꽃밭은 향기롭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꽃들이 찬란히 피어나 여기저기서 손짓을 한다. 도반 언니의 전화 한 통에 평소에 다니던 운산암에 가기로 한다. 이 봄날 오라는 이는 없어도 갈 곳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이왕이면 사시기도 시간에 맞추기 위해 서두르니, 아침시간이 바빠진다. 꿈틀대다가는 늦어질 것 같아 부지런을 떨면서 허둥대다 보니 벌써 약속시간이다. 봄날의 하루가 궁금해진다.

남면 벽송리로 들어선다. 다른 곳은 벚꽃이 지고 있는데, 암자로 가는 길은 아직 꽃이 한창이다. 우리가 오기를 기다려 꽃이 피어난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을 잠시 해본다.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니 이유 없이 행복해지고 마음이 아름다워진다.

벌써 이 길을 다닌 지 십여 년이 되어간다. 고개를 내려가면 소중한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은 설레임이 주는 시골길이다. 오늘은 그 설레임을 만개한 벚꽃이 채워준다.
차량이 많지 않은 시골길로 들어서니 복사꽃도 만개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꽃샘추위 때문에 봄이 주춤했는데 연분홍 복사꽃 사이로 완연한 몸 기운이 감돈다.

이 봄날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가버릴 것 같아 괜스레 서러워진다. 나이는 자꾸 먹어 가는데 연분홍 복사꽃처럼 나이와 상관없이 마음이 봄날이다.

돌계단을 딛고 암자로 오르는 길, 노란색과 빨간색 튤립이 사랑고백이라도 하겠다는 듯 고개를 내밀고 있다. 언제 와도 이곳은 정겹고 맑은 기운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장독대 옆에 있는 벚나무의 벚꽃도 한창이다. 편안한 마음이 들어 암자로 들어서니,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행복해진다. 하늘은 파랗고 암자의 봄날은 향기로워 나도 꽃 한 송이가 되는 상상에 취해본다.

벚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시는 스님의 눈매가 오늘은 더 깊어지신 것 같다. 사시기도를 위해 법당으로 오르는 계단 양쪽 옆으로 꽃잔디가 환하다. 여기저기 봄날은 찬란하게 빛난다. 무채색이었던 나뭇가지에서 꽃이 피어나고, 연둣빛 새싹이 눈을 띄우고, 저 작은 잔디도 꽃을 피운다. 이 모든 일들이 봄을 허락한 보이지 않는 세계의 플랜일 것이리라.

사시기도는 길고 스님의 불경 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지면서 법당 안과 밖이 모두 청정해진다. 나만 홀로 몰입이 되지 않아 수 만 가지 생각이 찰나마다 스친다. 언제부턴가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더 많아진다. 과거의 순간들이 스치고, 까맣게 잊어버린 일들이 떠올라 스친다.

과거는 많은 시간을 지나온 것 같지만 찰나에 지나간 듯 거짓말처럼 빠르게 필름이 돌아가는 느낌이다. 생각들은 두서없이 서성이고, 미래엔 무엇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들이 스친다. 그러는 사이 정근 시간이 지나고 어느덧 반야심경도 끝나가는데 눈과 입은 법문을 읽었으나 생각은 홀로 떠돌아 오늘도 반성으로 차오른다.

사시기도를 끝내고 내려와 벚꽃이 아름답게 핀 장독대 옆 정자에 갔더니 구절초 씨앗이 있다. 스님께서 구절초 씨앗을 뿌려야 한다고 걱정이 태산이시다. 일기예보에 내일 비가 내리기로 되어 있으니 오늘 씨앗을 뿌려야 구절초가 싹을 띄우는데 좋다는 것이다. 도반 언니와 나는 인터넷으로 구절초 재배법을 검색해본다.

하지만 모판에서 키워 포트판에 이식해서 옮겨 심으라는 내용뿐 씨앗을 어떻게 뿌려야 발아가 잘되는지는 검색이 안 된다. 구절초 한 봉지에 용량이 1000 립이라고 씌어 있어서 많은 양의 씨앗이려니 했는데 아주 작고 가벼운 씨앗이다.

구절초 씨앗을 뿌릴 장소는 법당 뒤란 산언덕이다. 스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호미로 고랑을 파서 엄지와 검지로 씨앗을 뿌려 흙을 덮는다. 내일은 비가 내리고 그 비가 발아를 잘 시켜주길 기도할 뿐이다. 짧은 시간 구절초 씨앗을 뿌리고 나니 걱정이 앞선다.

발아율이 60% 이상이라고 적혀 있긴 하지만 뿌리는 방법이 적혀 있지 않아서 이렇게 뿌려도 제대로 발아를 할 수 있을 것인지. 씨앗만 버리고 말 것인지. 파종하고 비가 내리기를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을 나도 조금은 알 것 같다. 씨앗을 뿌렸으니, 소문이 날 것인데 발아가 제대로 안되어 꽃이 피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구절초는 오월 단오에는 줄기가 다섯 마디, 구월 구일(음력)이 되면 아홉(九) 마디가 된다 하여 구절초(九節草)라고 하고, 부인병에 좋다는 의미와 흰 꽃잎이 신선보다 더 돋보인다는 뜻으로 선모초(仙母草)라고 부른다고 한다.

꽃말이 순수, 어머니의 사랑이란다. 흰 꽃잎이 순수를 상징하고, 딸을 가진 어머니가 산에 자란 구절초를 말려 딸을 위해 차나 약재로 사용한다고 하여 어머니의 사랑이란 꽃말이 아닌가 싶다.

씨앗이 발아되길 기도한다. 어머니의 마음으로 기도하면 모든 것을 허락할까? 스님은 걱정되는 이 마음을 아실까? 법당의 부처님은 마음을 헤아리시겠지. 걱정이 앞서는 봄날의 시간은 꿈결처럼 속절없이 빠르게 지나가는데 하늘은 파랗다.

문득 ‘천사들이 질투하여 애너벨 리를 싸늘하게 죽여 무덤에 가둬버렸다’는 에드거 앨런 포의 시 ‘애너벨 리’가 떠오른다. 흰 꽃잎이 신선보다 더 돋보인다는 데 신이 질투해서 발아되지 않으면 어쩌나. 돌아오는 길 또 걱정이 된다. 아니다. 내일쯤 비가 내리리라. 따스한 햇살과 바람을 불러들여 발아할 수 있도록 두 손을 모은다. 봄날의 하루가 저문다.


- 隨筆약력 -
․ 화순초등학교 60회
․ 2008년「현대수필」 등단
․ 2008년「열린시학」 등단
․ 저서 시집『물고기자리』,『엄마의 재봉틀』
․ 광주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과정 수료
․ 현 전남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전담강사
․ 현대수필문인회원
․ 한국작가회원
․ 동천문학상, 열린시학상 수상


화순일보 mire537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