恨 서린 너릿재, 광주에서 화순을 넘어가기 위해, 또는 화순에서 광주 넘어오는 길목, 문뜩 얼마 전에 공연된 “너릿재 연가”에서 노(老)배우가 읊조린 대사가 또다시 머릿속을 스치고 간다.

“그려, 엄니가 너릿재고, 너릿재가 에미고, 니그 아버지가 너릿재고, 너릿재가 아부지고, 너릿재가 내 아들이고…” 가슴이 아린 한스러운 소리이다.

최근 화순탄광 이야기를 쓰면서 문뜩 오래전 금서(禁書) 취급을 받던 ‘말’지가 생각나 뒤졌더니 1989년 신년호에 “미군의 화순탄광 노동자 학살” 오현호 기자가 취재했던 해묵은 기사를 보는데, 화가 치밀다 못해 분노가 끓어오른다. 점령군이 되어버린 양민을 학살하고, 일부 세력과 어울려 자행했던 짓들이…



일제 패망 후 전국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난 노동 운동은 일본인 공장접수와 자주 관리운동이었다. 화순탄광 역시 노동자들이 자치 위원회를 구성해 자율적으로 운영하고 있었으며 노조 지도부에는 일제 강점기 광주학생독립운동 출신들이 참여하는 등 자체 지도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화순탄광 노동자 투쟁은 광복 후 일본 재산의 소유와 관리를 둘러싼 미 군정 측과 탄광 노동자들의 갈등에서 촉발되었다. 미군은 그 당시 주 연료였던 석탄의 생산지로 남한 석탄 생산 3위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던 화순탄광을 그대로 놓아둘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한 미군은 즉각적인 군정에 들어갔다. 미군은 각 지방을 장악하기 위해 처음에는 시찰단을, 다음에는 전술 부대를, 마지막으로 군정 요원을 차례로 파견한다.

미군이 전남에 들어온 것은 1945년 9월 10일이며, 미 군정은 행정과 치안 등 도정 일체를 인수한 즉시 인민위원회의 무조건 해산에 들어갔다. 특히 노동자들이 직접 광산을 접수하여 자주 관리운동을 펼치던 화순탄광은 불편한 심기였다.

미 군정은 그해 12월 6일 군정법령 33호 포고를 통해 일제가 남긴 국 공유 재산뿐 아니라 사유재산까지 접수하겠다고 포고령을 발포하면서, 11월 초 화순탄광을 다시 점령한 미군은 서울 출신의 극우 인사 임성록을 소장자리에 앉혔다.

그는 노동자들이 임금 투쟁이나 파업을 전개한다면 징역형을 살게 하겠다고 위협하였으며, 또한 노조 간부 3인을 비롯한 100여 명의 노동자를 해고하여 노동자들의 불만이 극도에 달하도록 하였다.

미 군정의 탄압에 맞서 화순탄광 노동자들은 1946년 2월 24일 전 종업원 대회를 개최하고 최저 생활 확보 임금제 실시, 해직자 복직, 후생 시설 정비, 소장 독재 배격, 불량임원 축출, 일요 완휴제 등 6개 항을 군정청에 제시하고 협상을 요구한다. 화순탄광 노동자들의 2월 투쟁에서의 요구는 노무 조정 위원회의 협의를 거쳐 타협에 이르렀다.

그 당시 화순탄광에는 광부 1,700여 명이 일했고 가족까지 포함하면 약 5,000여 명이 화순탄광에 의존해 생활했다. 하지만 광부들은 높은 식량 가격을 따라갈 수 없는 저임금에 시달렸고, 식량 거래를 전적으로 자유 시장에 맡겼던 미 군정의 초기 정책은 광부들의 생활고를 더욱 힘들게 하였으며, 이에 1946년 2월 정책을 바꿔 일제 말의 식량 배급제를 부활시켰고 이에 따라 광부들은 식량과 현금으로 임금을 받았다.

그러나 막장에서 생명을 담보하는 노동의 대가에 비해, 적은 임금과 배급량이 적은 수준으로 광부들의 불만은 항상 쌓여 있었다.

그들이 받았던 식량은 하루 정도 분량의 쌀로 5일을 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늘상 굶주린 최악의 상태에서 막장으로 들어가 노동을 했었다고 전언한다.

그런 갈등 속에 1946년 광복 1주년 기념식을 계기로 그들의 분노는 폭발한다. 광주 지역에서 개최되는 광복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 3시 광주로 출발한 화순탄광 노동자들을 현수막을 쓰는 데 필요한 천 조각이 없어 짚으로 가마니에 글을 써 ‘완전 독립 보장’‘쌀을 달라’ 등의 구호를 쓴 가마니때기를 들고 70리길 광주로 출발하였다.



화순 너릿재에 오르니 먼동이 서서히 밝아 오면서 미군 정찰기가 머리 위를 선회하고, 얼마간 지나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서너 대의 장갑차와 미군들을 실은 트럭과 함께 광주 진입을 막자, 노동자들이 항의하자 미군들은 불법 집회이니 화순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하였다.

옥신각신하는 과정에서 일부는 광주 시내로 진입하여 “우리에게 쌀을 달라” “완전한 독립을 달라” 등을 외치며 돌아다닌다.

광주진출 저지에 실패한 미군은 완전무장에 착검을, 기마경찰대. 조선 무장경찰대, 폭격기 등 동원하여 무자비한 강제해산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폭력적인 진압과 총격을 가했으며, 노동자들은 너릿재 정상까지 쫓겨 와 30여 명이 학살당하고, 500여 명이 상처를 입었다.

사건으로 미 군정과 화순탄광 노동자들의 갈등은 더욱 치열해졌으며, 화순 광업소 민중봉기 적 투쟁 역사의 서막이 시작된다.

다음호에 계속 ---


정소윤 기자 mire5375@hanmail.net        정소윤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