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물속에도 탑이 있네!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분명히 물속에 삼층석탑이 있다. 연못 중앙에 섬을 만들어 탑을 옮겨놓았는데 좋은 배경을 얻게 될 것 같아 카메라 셔터를 누르려고 보니 또 하나의 탑이 물결 속에 비췬다.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상을 만들고 있는 곡성 태안사에서 만난 삼층석탑이다.

우리나라의 산야를 걷고 있으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풍스러운 탑을 볼 수 있다. 가까이 다가가 손 뻗어 탑에 새겨진 무늬를 만져보면 손끝에 전해지는 느낌이 온몸으로 선명하게 파고들고, 이끼 낀 탑은 정겨운 옛이야기 한 토막을 숨겨 놓은 것처럼 친근하게 느껴진다.

탑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불탑과 승려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이 있다. 불탑은 경내 중심부나 법당 앞에 세우나 사리탑은 부도라 하여 경내에서 조금 벗어난 한적한 곳에 세웠다.

불탑은 단순한 건축물이라기보다 부처님의 사리 봉안이 탑의 존재 이유인 만큼 부처님의 몸, 진리 그 자체라고 인식하였다고 한다. 불상이 탄생하기 전까지는 탑이 불교의 매우 중요한 예배 대상이 되었고 탑을 세운 후에는 신자나 승려는 탑 주위를 돌거나 그 앞에 엎드려 석가모니를 숭배하게 되었다.

불교가 민간신앙화 되면서 탑돌이는 사월 초파일 연례행사가 되어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고 자신의 소원을 빌며 등을 밝히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형태로 변화된 듯 하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탑은 화강암으로 만든 석탑이다. 처음에는 나무로 탑을 쌓았으나 수명이 오래가지 못했고, 흙을 구워 벽돌을 만들어 쌓은 전탑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벽돌이 깨지거나 지속성이 없었으므로 돌을 다듬어 만든 석탑을 많이 세운 것 같다.

석가모니의 실체인 불탑을 절대적 존재인 바위로 탑을 완성한 나라는 오직 우리나라뿐이라고 한다. 하나의 탑을 완성하려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한 작업으로 일생을 바치는 오랜 시간과 뼈를 깎는 고초가 뒤따랐을 것이다.

그래서 긴 세월이 흘러 풍화되어도 꿋꿋하게 제자리를 지키며 남아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구슬땀을 흘리며 탑을 축조했지만 이름 한 자 남기지 못한 석공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탑을 바라보고 있으면 지붕돌이나 기단의 덮개돌에는 이끼가 끼고 퇴색된 모습 때문에 고풍스러운 느낌이 들지만 탑신들은 새로 깎아 넣은 것처럼 지붕돌과 색채가 다르고 깨끗하여 어울리지 않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오랜 세월 낙수면은 비바람에 노출되어 풍화작용을 일으킨 반면 탑신들은 낙수면이 보호해주는 덮개 덕분에 하나의 탑 내에서 서로 다른 색채를 띠며 탑신부를 장식하고 있는 것이다.

낙수면을 보고 있으면 마치 어머니가 험난한 세상 자식들을 비바람에서 보호해주기 위해 감싸 안고 있는 모습이랄까? 잔뜩 웅크린 채 어머니 자신의 몸이 둥글게 굽어가는 줄도 모르고 자식들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베푸는 모습이 그려진다.

나의 어머니는 산골짜기 가난한 농군인 아버지에게 시집오셔서 자신의 몸은 제대로 돌보지도 않고 어려운 살림에 육 남매를 키우느라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이젠 꽃 같은 젊은 시절 다 보내고 희고 고운 얼굴엔 주름살과 검버섯만 늘어간다.

거울을 앞에 두고 흰머리에 검정물 들이는 모습을 볼 때면 괜히 코끝이 찡해진다. 거울을 보면서 힘겹게 살아온 지난날의 삶도 돌아보실 텐데 그 마음이 어떠실까. 이젠 편히 쉴 만도 한데 아직도 자식들 걱정에 여념이 없으시다.

부처님의 사리를 소중히 간직한 탑신부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지키고 있는 낙수면처럼 어머니는 자식들을 탑신부처럼 비바람에서 보호해주며 아무 일 없이 잘 살아주기를 끊임없이 기도하신다.

어머니의 마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살아오는 동안 따스한 말 한마디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건네 본 적 없는 것 같다. 비바람에 검푸른 이끼를 잔뜩 키운 낙수면처럼 자신을 돌보지 않고 살아온 어머니의 삶은 탑을 세우는 일처럼 자식들에게 정성을 기울이는 일이었으리라.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쓸쓸히 빈자리를 지키면서 자식들의 안위를 걱정하며 탑돌이를 하고 계실 어머니들을 생각해 본다. 아니 내 어머니를 생각한다. 풍화된 탑의 낙수면이 있어 탑신이 보호되듯이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 낙수면 같은 따스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기도하는 것은 내 욕심일까,

하지만 사람은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다.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 영향을 끼치며 살아가는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탑이 무너지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균형과 조화가 잘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사는 세상도 하나의 탑처럼 균형과 조화가 잘 이루어지기를, 서로에게 낙수면 같은 존재가 되어 우리의 삶이 행복해지기를 기도해본다.

- 隨筆약력 -
․ 화순초등학교 60회
․ 2008년「현대수필」 등단
․ 2008년「열린시학」 등단
․ 저서 시집『물고기자리』,『엄마의 재봉틀』
․ 광주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과정 수료
․ 현 전남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전담강사
․ 현대수필문인회원
․ 한국작가회원
․ 동천문학상, 열린시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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