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마음으로 들어왔다. 바람은 적벽이 보고 싶다고 귓가에서 오래 머물렀다. 마음이 흔들렸다. 적벽을 보러 가자고, 새해가 오기 전에 적벽을 아니, 대한민국 지도를 품고 있는 동복호와 적벽을 내려다보고 싶어졌다. 오래전 기억이 자꾸만 바람의 편이 되었다.

옹성바위를 타고 올라갔던 옹성산이 나를 부르는 듯 기억은 자꾸만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K와 만나던 날, 묘지봉에서 내려다보았던 적벽이 보고 싶다고 바람은 입을 열었다. 바람은 K를 향해 질주하듯 마음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K를 흔들었나 보다. 우리는 한편이 되어 역적모의를 하는 사람처럼 날을 잡았다. 옹성산을 오르자고, 새해가 오기 전에.

날을 잡고도 바쁜 일정 때문에 갈 수 있을까 망설여졌다. 하지만 신은 우리의 안위를 걱정해주는 진정한 한편이 되어 주었다. 드디어 옹성산을 향해 발걸음을 전진했다. 저 멀리 옹성산이 보이고, 금방이라도 적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듯한 상상을 했다.

옹성산 안내판을 앞에 두고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잠깐의 망설임 사이로 편한 길을 택했다. 앙상한 겨울나무와 낙엽으로 사각거리는 나뭇잎을 밟고 산을 올랐다.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아무도 없는 조용한 산길을 K와 재잘거리며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약간의 일탈과 조금의 여유로 행복한 마음이 서로에게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낙엽을 밟아 사각거리는 발자국 소리와 바람소리뿐, 산속은 적막하지만 그만큼의 설렘이 발걸음에 힘을 실어준다. 옛 기억은 깜박이는 형광등 불빛처럼 희미하고 때론 각색이 되는 것이지만 산은 품을 넓혀 아늑하게 우리를 안아 주는 것 같다.

너와 집 같은 허름한 곳 빈터에 앉아 귤껍질을 벗기며 주위를 둘러본다. 귤처럼 달콤하고 향긋한 여유 때문인지 겨드랑이 밑에서 마치 날개가 솟아나는 것처럼 몸이 가벼워지고 저 멀리까지 행복한 웃음소리가 퍼져나간다.

일 년 내내 여유 없이 숨 막히게 달려온 날들이 뒤돌아보아진다. 힘들고 아득한 시간들도 지나고 나면 별거 아니었다고, 잘 견뎠다고 나를 토닥이면 정말로 위로를 받은 듯 깨알처럼 행복해지는 기운이 전신을 바람처럼 쓸고 지나간다. 굳이 말하자면 내려놓음의 여유라고나 할까. 옹선산 빈터에 앉아 무거운 무엇이라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해지는 것은 자연이 품어주는 넉넉함 때문은 아닌가 싶다.

희미한 기억도 이제는 지워지고 이정표만 보고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망설인다. 어디로 가든 정상은 우리를 기다릴 것이고, 우리는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니 무엇이면 어떠랴 싶다. 우리는 백련암터를 먼저보고 올라가기로 한다.



큰 바위가 있는 백련암터엔 불경과 목탁만이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무도 없지만 또한 누구나 앉아서 쉬어가라는 듯 불경 사이로 마음이 들어앉는다. 세속을 벗어나 하루쯤 여유를 찾아 나선 우리를 응원하는 듯 바람도 잠잠하다.

자연의 품속에 들면 비수를 품은 듯 날카로웠던 마음도 어느 사이 넉넉해진다. 복잡한 도심을 떠나 온 마음을 안다는 듯 어루만져주는 산의 위로 덕분일 것이리라. 저 멀리 정상이 보이고 위험한 곳에 안전하게 묶어진 밧줄을 잡고 산을 오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가끔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밧줄이 있어 서로에게 위안을 주며 또 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드디어 정상이다. 별로 높지 않은 옹성산, 572m라고 쓰인 표지석을 바라본다. 그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동복호와 적벽은 아름다운 또 하나의 대한민국을 품고 희망을 잊지 말라는 듯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망향정 설움 사이로 피어난 대한민국 형상이 갑자기 나의 정신을 일으켜 세운다. 무술년 새해, 용맹하고 충성심이 강한 의로운 황금 개띠해를 맞이하여 우리의 꿈도 상승하는 더불어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염원한다. 두 손이 저절로 모아지며 힘찬 비상을 기원한다. 기복신앙에 길들어진 지난 시간들이 비록 나약한 모습이었다고 해도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

날이 좋아서, 바람이 마음을 움직여 주어서, 부질없는 자유라고 해도 누릴 수 있어서 오늘도 행복하다. 조금만 내려놓고 여유를 찾는 내 편 같은 마음 하나 있어 2018년도 행복할 것을 믿으며 아래로 아래로 내려온다. 저 멀리 보이는 속세에 들어도 얼마쯤 견딜 수 있으리라. 그리고 또 오르리라.

- 隨筆약력 -
․ 화순초등학교 60회
․ 2008년「현대수필」 등단
․ 2008년「열린시학」 등단
․ 저서 시집『물고기자리』,『엄마의 재봉틀』
․ 광주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과정 수료
․ 현 전남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전담강사
․ 현대수필문인회원
․ 한국작가회원
․ 동천문학상, 열린시학상 수상


화순일보 mire537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