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탑처럼 쌓여간다.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는다고 하지만 그것도 쉽지는 않다. 우편함에 넣어둔 책을 가져와 그대로 거실 탁자 위에 올려놓을 때도 있다. 책이 봉투에 담긴 채 며칠이 흐를 때도 있다. 책에게 책을 쓴 작가에게 슬그머니 미안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저승에 간 세종대왕이 글을 모독한 이유로 어명으로 벌이라도 내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책상 위에 그리고 방안은 산사에 가면 쌓여 있는 돌탑처럼 책이 여기저기 쌓여 있다. 책꽂이에 넣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읽은 책, 읽지 않는 책, 작가의 싸인이 된 책, 아끼는 책 등이 탑을 이룬다. 책 감옥에 갇히는 상상을 하게 된다. 어쩌면 이미 책탑이란 감옥에 갇힌 것인지도 모른다. 책을 신성시 여기지 않고 함부로 다룬 죄를 누군가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그 무엇보다도 내 마음에 짐처럼 쌓이는 죄책감을 어떻게 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지낸 세월이 이제는 탑을 쌓아 올려 운주사의 9층 석탑 높이만큼 높아지고 있다. 책사(冊寺)라도 하나 지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지난시절을 돌이켜보면 책을 살 돈이 없어 읽고 싶어도 읽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된 시절이 아니어서 책에 대한 정보도 알지 못했고, 도서관도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누군가가 주는 책은 귀한 선물이었다.

학창 시절, 읽을 것이 없어서 집으로 배달되어 오는 농민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던 적도 있었다. 그 시절 아버지가 없는 살림에 비싼 돈을 주고 사주신 전집은 귀한 선물이었다. 직장에 다니면서 월급날 서점에 들러 책 한 권 사는 일은 세상에 감사할 줄 아는 날이었다.

그 가슴 뛰던 소중한 날들이 어떻게 흘러가 버렸을까. 마음에서 맑은 종소리가 나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 소리를 잃어버리고 감각이 마비되어가고 있다. 단어와 문장 사이에 갇혀 여백의 미를 잃어버린 지도 오래되었다.

으악새 슬피 우는 가을이 깊어가는 데 마음에는 바람만 휘날리고 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고 했다는 안중근 의사 말이 아니더라도 가을은 독서의 계절인데 이 가을에 더욱더 죄책감이 쌓이고 있다.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감동이 오지 않는다. 얼마나 더 아름다운 것이어야 가능할까. 감수성이 떨어지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환성과 감탄이 쏟아져 나와야 하는데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 지나가는 바람에도 몸서리치게 슬퍼지던 시절이 있었는데 슬픔도 메말라가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책을 읽지 않고 탑처럼 쌓아 놓아서 가슴이 돌처럼 굳어 심장에 뜨거운 피가 흐르지 않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죽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 권의 시집으로도 충만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아니다. 몇 권을 읽어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 가슴 저 밑바닥이 답답할 뿐이다. 더 이상 뛸 심장이 없어서 더욱더 글에 빚을 진 느낌이 든다.

젊은 날에 읽었던 데미안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수어야 한다”라고 깨고 나갈 세계를 가질 의지가 없이 나약해지고 있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멈춘 지가 오래되었다.

아끼던 책을 쌓아둔 탑을 무너뜨려 “데미안”이라도 다시 읽어봐야겠다. 옛 기억을 더듬는 데는 한계가 있다. 멈추어버린 여행을 다시 시작하려면 멈춘 곳으로 돌아가 나에게 질문하고 물어봐야 하리라.

수없이 쌓아둔 저 책탑을 무너뜨리고 다시 쌓아 이름이라도 하나씩 붙여줘야겠다. 내가 쌓았으니, 나 스스로 무너뜨릴 줄 알아야 한다. 무너뜨리고 또 무너뜨리고 그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좀 더 명확해지지 않을까. 신성한 글의 감옥에 갇혀 허덕이는 꿈의 세계에 조금 더 감사해하지 않을까.

가을이 깊어간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도 가슴 뛰는 심장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더 이상 늦기 전에 책탑에 들어앉아 오늘부터라도 앉아서 하는 여행을 떠나보리라. 나를 찾아 떠나보리라.

그 옛날 소원을 빌며 탑돌이를 했던 여인네의 간절한 마음. 그 마음으로 책탑을 돌아보리라. 두 손을 모으고 가슴 뛰는 마음을 달라고 책탑을 돌아보리라.


- 隨筆약력 -
․ 화순초등학교 60회
․ 2008년「현대수필」 등단
․ 2008년「열린시학」 등단
․ 저서 시집『물고기자리』,『엄마의 재봉틀』
․ 광주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과정 수료
․ 현 전남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전담강사
․ 현대수필문인회원
․ 한국작가회원
․ 동천문학상, 열린시학상 수상


화순일보 mire5375@hanmail.net